영화 강국인 미국 일본 프랑스에 비해 우리나라의 영화 연구 환경은 척박하기 그지 없습니다.
교수들은 대부분 유학가서 학위 딸 때 연구했던 영화들 외에는 아무 견해도 내세울 줄 모르는 바보들이거나, 영화 창작력은 좋을 지 몰라도 탁상에서의 강의 능력이라곤 전혀 없는 현역 영화인들로 포진되어 있으니, 그들에게 양질의 연구나 서적을 기대하기 어렵고
잘나가는 평론가들은 점점 연예인화 되어가는데, 일단 유명세 타면 교수나, 영화제 사무국 자리나 방송 패널 자리 얻기 바쁘니 역시 그들에게 제대로 된 '아하 그렇구나' 하는 안목을 기대하기 힘들고 ....
영화 기자란 직업은 멸종되어가고 ...
결정적으로 영화 서적 시장은 책 카테고리에서 장사 안되는 항목으로 손에 꼽을 정도니 당연히 좋은 책이 제때 제때 번역될 리 없는데다, 번역된 책들도 그맘때 안사면 초스피드로 절판되어 버리니
영어 프랑스어 원서 읽을 능력이 안 되는 이상
우리나라에서 영화책을 사서 읽는다는 것은
바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선풍기 살까 부채 살까 에어콘 살까 고민하는 정도의 결정권 밖에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비유가 적절한 지 모르겠군요.)
암튼 그런 와중에도 출판인들의 피나는 (피는 출간 뒤에 더 나겠지만서도 ...) 노력으로 출간된 책들 중 베스트를 꼽아봤습니다.
어쨌든 불완전할수밖에 없고 협소할 수 밖에 없는 리스트입니다.
1.영화란 무엇인가? _ 앙드레 바쟁 저 (프랑소와 트뤼포 서문) / 박상규 옮김 / 사문난적
(요건 제가 샀던 절판된 버전의 표지입니다. 현재 표지는 달라요.)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이 책의 제목은 이 책 페이지 전체에 걸쳐 저자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하나의 문제의 예고로서, 그 이상으로 하나의 해답을 약속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책은 전혀 영화에 대한 완전한 지질학이나 지리학을 제공하려고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비평가의 매일 매일의 고찰의 대상으로서 주어진 영화작품에 관해 실제로 행해진 일련의 수심측량의, 탐험의, 상공비행의 한가운데로 독자를 끌어들이고자 의도할 따름이다. _ 앙드레바쟁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유령 같은 회색 또는 갈색의 저 그림자들, 그것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가족 초상화가 아니다.그것은 예술의 마술적인 효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정한 기계장치의 효과에 의해 자신의 시간 속에 정지되어서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와진 생명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현존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은 예술처럼 영원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대해 방부처리를 행하여 다만 시간을 그 자신의 부패로부터 지킬 뿐이기 때문이다. -사진예술의 존재론 중
프랑스의 유명한 영화잡지 '까이에 뒤 시네마'의 발행인이자, 과거 프랑소와 트뤼포의 후견인이 되어주는 등 누벨바그 작가들에게 스승과도 같았던 앙드레 바쟁.
오손 웰즈, 로베르토 롯셀리니, 장 르누와르, 칼 드레이어,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 등등의 거장 감독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흥미로운 글을 썼던 영화평론가.
그는 영화평론가의 의무를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극장에서 품었던 느낌을 최대한 지속되도록 도와주는는 것'이라 정의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통틀어 그 정의를 충분히 지켜내려 했고, 어쩌면 그 이상의 지평을 보여준 단 한 명의 위대한 영화평론가입니다.
루이스 부뉘엘과 관련된 앙드레 바쟁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영화 '잊혀진 사람들'을 발표한 루이스 부뉘엘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앙드레 바쟁과 인터뷰를 가집니다.
당시만 해도 부뉘엘은 '안달루시아의 개'를 연출한 센세이셔널한 실험영화 감독으로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사람들이 그의 진가를 몰라주며 서서히 잊혀져 갈 때였습니다. 문제는 부뉘엘 스스로도 자신의 진가를 자각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바쟁은 부뉘엘과의 진지한 인터뷰를 통해 그가 이미 영화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있음을 깨우쳐줬습니다. 부뉘엘은 바쟁과의 대화 도중에 불현듯 자신이 어떤 의지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한번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영화를 통해 무얼 이야기 하려는 건지 깨닫고, 진정한 작가로 거듭난 것이죠.
어찌보면 극히 드문 예이기 때문에 영화평론가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얘기할 때 수없이 거론되는 일화 입니다.
하지만 자잘하게 보면, 이런 식의 에피소드는 영화계에서 언제나, 끊임없이 벌어집니다. 영화 감독, 작가, 프로듀서들은 스스로가 뭘 하는지, 뭘 원하는지, 왜 이런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지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심지어 그 주변인이 영화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친구, 애인, 가족이거나 사업상 만나는 파트너더라도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에 대해 자각하거나, 뭔가 영화세계에 반영될만한 관점을 배우거나 버리거나 합니다. (물론 이런 행위의 파편들은 거의 언제나 자본이라는 거대한 구렁이에게 잡아먹혀버려서 흔적도 남지 않게 되곤 하죠.)
당연한 얘기지만, 독고다이가 능사라면 인간은 영화 따위 만들지 않습니다. 영화를 만든다는 행위 자체가 기본적으로 소통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를 발표한 뒤 뒤따르는 온갖 이야기, 되새김이 없다면 그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화 곁을 부유하는 모든 영화의 친구들 중에 앙드레 바쟁은 역사상 가장 저명하고 사려깊고 유익한 절친이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정수와도 같은 짧은 비평과 아포리즘을 모은 '영화란 무엇인가?'는 말 그대로 영화가 무엇인지 한번쯤 깊이 있게 생각해보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 앙드레 바쟁의 다른 훌륭한 책들, '장 르누와르' '잔혹 영화' 등을 포함하고, 대표해서 한 권을 뽑았습니다.
2. 히치콕과의 대화 _ 프랑소와 트뤼포 저, 곽한주 이채은 옮김, 한나래 (절판)
영화 역사상 영화에 대해 나눈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 중 하나로 꼽힐 만 합니다.
이 책을 쓴 프랑소와 트뤼표는 요즘 시쳇말로 사기 캐릭에 가깝습니다.
까이에 뒤 시네마 기자 시절 '프랑스 영화에 고함'이란 글로 영화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뒤, 넌 얼마나 잘찍나 보자는 세간의 시기와 저주를 비웃기라도 하듯 '400번의 구타'가 칸에서 찬사를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하여, 평생 수많은 걸작을 연출했죠.
간혹 배우로 영화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연기력이나 얼굴이 꽤 봐줄만 한 수준이었습니다.
트뤼포는 평생 25,000편의 영화를 봤다고 하는데 이게 1년에 500편씩 꾸준히 50년을 봐야 볼 수 있는 편 수 입니다.
암튼 그런 트뤼포가 너무나 사랑하는 감독, 당시 전 세계 기업 순위 5위에 빛나는 유니버설 영화사의 상임 이사이자 가장 많은 개런티를 받는 스타 감독, 하지만 결코 예술적으로는 그 위대한 성취를 대접받지 못했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을 장시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고스란히 글로 옮긴 게 이 책, 히치콕과의 대화 입니다.
머릿말에 보면 트뤼포가 이 인터뷰를 하기로 한 결정적 이유가 나오는 데, 그게 참 공감가면서 웃깁니다.
미국의 어느 기자와 대화하는데, 트뤼포가 '이창'이 걸작이라며 칭송하자 그 미국 기자가 '그건 당신이 그리니치 빌리지 거리가 어떤 곳인지 몰라서 그렇게 영화가 좋아보이는 거다'라고 비웃었다는 겁니다.
발끈한 트뤼포는 또다른 여러가지 이유가 쌓여 히치콕을 인터뷰하러 친구 끌로드 샤브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이 책이 없었다면, 현재까지 알프레드 히치콕이 어떤 위상으로 평가받을 지 모를 일입니다.
히치콕은 언론을 싫어해서 인터뷰를 해도 기자가 알아듣지도 못할 아이러니와 빈정거림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그의 진짜 의도는 끝내 그냥 그의 영혼과 함께 지상의 먼지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거죠.
예를 들어 영화 '의혹'에서 캐리그란트가 들고 가는 (독약이 담긴) 우유잔 장면의 서스펜스를 강화하기 위해 잔 안에 전구를 넣었다거나,
'현기증'의 유명한 계단 장면을 찍기 위해 가로로 누운 계단 세트를 지었다거나... (그 세트 제작비로 35,000달러 밖에 안 들었다는 히치콕의 자랑에, 트뤼포는 '오 마이 갓, 그 장면을 정말 좋아하셨군요.'라고 대답합니다.)
아무튼 무수히 많은 일화 속 히치콕의 진짜 의도들은 들어볼 기회 없이 파묻혔을테니까요.
3. 감독 오즈 야스지로 _ 하스미 시게히코 저, 윤용순 옮김, 한나래
미조구치 겐지, 구로사와 아키라도 그렇지만, 오즈 야스지로는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서구사회의 열광어린 시선이 주류가 되다보니 정작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일본인, 나아가 동양인들은 그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를 소홀히 해온 감독입니다.
과거 까이에 평론가들이 자막도 없는 프린트를 봤기 때문에, 그 독특한 다다미 앵글, 동양 특유의 균형감각 (한쪽에 인물이 너무 많으면 대비되는 쪽엔 나무 한 그루를 프레임에 잡아낸다거나 ...) 등 주로 미장센 측면에서만 논해 왔던 것이죠.
하스미 시게히코는 스펙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사람들이 후덜덜 할만한 직함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무려 동경대 총장을 지닌 분이죠.
문화 평론가이자 교수인 하스미 시게히코가 서양인들 위주의 연구와 평가에 치우친 오즈 야스지로에 대해 그야말로 자국인들만이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연구의 정수를 책으로 담은 게 이 작품입니다.
목차부터 흥미롭습니다.
서장 유희의 규칙
제1장 부정한다는 것
제2장 먹는다는 것
제3장 옷을 갈아입는 것
제4장 산다는 것
제5장 보는 것
제6장 멈춰 서 있는 것
제7장 날이 개인다는 것
종장 쾌락과 잔혹함
부록 1. 인터뷰: 아츠다 유하루
부록 2. 인터뷰: 이노우에 유키코
부록 3. '동경 이야기', '가을 햇살' 촬영 기록 -아츠다 유하루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은 다른 어떤 작가의 영화보다 몸짓과 시선, 일상적인 행위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때문에 '일상성과 반복성'은 오즈 영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평가되어 왔습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그 도식적인 평가를 뒤집으려는 시도를 보입니다. 유실된 수많은 오즈의 초기작, 그리고 특히 오즈 작품으로는 예외적인 '비상 경계선의 여자' 등은 이런 도식성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은 반쪽짜리 오즈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느다고 생각한 것이죠.
오즈에 관한, 아직 사그라들지 않는 논쟁의 출발선을 이 책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따로 적어 기록하고 싶을 만큼 문장이 좋습니다.
4. 마법의 등 _ 잉마르 베리만 저, 민승남 옮김, 이론과 실천
(사진 출처 : 씨네 21)
어린 시절부터 영화에 거의 미쳐 있던 잉마르 베리만은 자기 형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시네마토그래프(일종의 영사기)를 선물받자, 병정 인형 100개를 주고 시네마토그래프와 맞교환합니다.
잉마르 베리만이 거의 70에 가까운 시절에 발표한 책인데, 저자의 어린 시절 회고를 보면 이 양반의 기억력에 감퇴란 없구나 라는 걸 절절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만 한 게 위의 에피소드도 그렇지만, 두 살 무렵 동생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직접 감행까지 했던(물론 실패했습니다.) 기억을 너무나 생생하고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이 거장이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포착하지 못하는 삶의 생생함과 세세함을 어쩌면 그렇게 절묘하게 묘사할 수 있는지 그 능력의 기원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됩니다.
특유의 건조한 필체로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묘사하는 대목에선 역설적으로 그의 영혼이 전혀 늙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감각의 날카로움. 그런 것이 그의 영혼을 파괴할 지언정, 우리들은 주옥같은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선물이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
스웨덴 왕립극장 감독을 역임하는 등, 평생 연극에도 애정을 쏟았는데 이 책에는 연극에 대한 얘기도 많습니다.
참고로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마피아 보스인 에브루찌 역할로 얼굴을 알린 피터 스토메어는 잉마르 베리만 극단의 대표적인 배우입니다.
요 아저씨요.
잉마르 베리만 극단의 '햄릿' 순회 공연으로 뉴욕에 왔을 때, 코엔 형제가 버선발로 달려와서 배우로 섭외했는데, 당시 준비하던 작품은 어떻게 출연을 못했다가, 파고에서 무시무시한 악당으로 섭외가 되어 헐리우드에 발을 딛었죠. 그래봤자, 스티부 부세미가 닭 사료로 갈아버렸지만 말이죠 ...
5.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 2 _ 정성일 저, 현실문화연구 (절판)
지나치게 수사적이고 현학적이며 도무지 끝날것 같지 않은 장문의 꼬인 문장을 구사하는 점만 뺀다면, 정성일 감독은 한국에서 가장 통찰력 있는 영화 평론가이자, 영화계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친구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가 아니라면 교묘히 스펙사회인 한국 영화계에서 누가 그렇게 임권택, 김기덕 감독을 진지하게 논했을까요?
아직까지도 국졸이니 중졸이니 하며 은근히 무시당했을 게 뻔합니다.
알라딘의 책 소개에서 인용해 봅니다.
정성일이 임권택과 대담한 시간은 1천 5백 20분이며, 이 때 찍은 디지캠 촬영시간은 64시간이다. 2002년 7월 말에 시작하여 거의 매주 12월까지 인터뷰를 했고, 그때마다 임권택 사모님이 해주신 점심을 먹었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한 대담은 소탈하고 격의없어 읽는이를 주눅들게 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글을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와 대담을 진행하는 동안 영상자료원과 부산영화제를 통해 무수히 많은 잊혀진 임권택 영화들을 재발굴 해서 그 다양한 스펙트럼을 사람들이 직접 목도할 기회를 줬으며, 짝코, 안개마을 등 임권택의 많은 영화들에 재평가의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심지어 취화선 촬영장에 100일간 따라다녔으며 (요건 천년학일 수도 있습니다. 기억이 ...), 임권택의 근작들이 투자받는 데 직접 기여하기도 했죠.
임권택 감독이 현재 아주 정정하신 분이긴 하지만, 그냥 묘사적으로만 본다면 이건 거의 중증환자 병동 역할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거죠. 한국 영화 사회에서 화석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었던 현존하는 거장 감독을 극진히 간호하고, 재활치료 해드리고, 대담까지 해서 기록을 남겨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존경받아야 마땅한 한 감독의 동시성을 보호해 낸 거죠.
(이런 묘사가 좀 죄송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부분적으론 적절하다고 생각 합니다.)
한국에선 이런 연구 사례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젊은 영화학도들이 영화 서적의 영원한 고전으로 애정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근데, 결국은 절판이네요.... 휴...
6. 비열한 거리 - 마틴 스콜세지: 영화로서의 삶 _ 데이비드 톰슨 엮음, 임재철 옮김, 한나래
이 책의 몇 안되는 단점 중 하나는 이 책이 만들어지던 때가 마틴 스콜세지가 야심작인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준비하던 때라 이 작품을 스콜세지 필생의 도전과제로 두고 여기에 도달한 여정처럼 그의 영화인생을 묘사한 태도 입니다.
그걸 제외하면, 마틴 스콜세지란 캐릭터가 원래 그렇듯 영화에 관한 온갖 흥미진진한 수다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컨셉 자체를 마틴 스콜세지 영화에 담긴 '죄의식과 구원'에 초점을 맞췄으며 이를 통해 워낙 달변가에 중구난방인 스콜세지 이야기에 일관성을 부여해 놨습니다.
이 책을 통해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됐는데, 하나 예를 들면
스콜세지의 아버지는 일종의 은퇴한 한량인데, 그는 과거 생활 양식을 기억하는 데 비상한 재능을 지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전형적인 참견꾼에 투덜이 였습니다.
요런 게 한데 얽혀 그는 영화나 티비를 보면, 예를 들어 뉴욕 풍경이라도 나올라 치면 뭐가 틀렸는니, 이게 잘못됐느니 말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쩌다보니 스콜세지가 아버지의 이 재능을 자신의 영화에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분노의 주먹을 만들며 그에게 의상 고증을 맡겼다고 하네요. 근데 그 일을 기가 막히게 잘 해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어머니가 스콜세지에게 엄청나게 감사를 표했다고 합니다. 투덜이를 집에서 쫓아내줘서 ...
뭐 이런 주옥같은 에피소드가 가득 담긴 가운데, 그의 영화에 대한 상당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보석 같은 평전입니다.
7. 봉인된 시간 _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저, 김창우 옮김, 분도 출판사
표지가 바뀌었네요.
이 책이 아니었다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저에게 지금보다 훨씬 아스트랄 한 감독이었을 겁니다.
그의 영화의 비내러티브성은 악명 높습니다.
과거 영화 희생을 우리나라에서10만 명이 본 건 아마 세계 영화계에서도 경악했을 만한 사건일 겁니다.
사실 타르코프스키의 초기작을 본 사람들은 그가 원래 소설적 내러티브에 능한 감독이란 사실을 알 겁니다.
데이빗 린치가 스트레인지 스토리로 증명했듯 타르코프스키도 원하면 언제든지 능숙하게 소설적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감독입니다. 다만 그가 추구하는 영화적 이상이 다른 지점에 있을 뿐.
다행히 이 책은 그의 영화처럼 불친절하진 않습니다.
책 속 한 구절.
"예술은 이리저리 실험하도록 허용하는 학문은 아닌 것이다. 실험이 다만 실험의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면, 즉 한 예술가가 한 편의 영화를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극복하는 은밀한 작업 과정을 묘사해 주고 있지 못한다면 예술의 본질적 목표는 이룩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같은 한 사람이 영화의 경계선을 우주적으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이해하기 힘든 그의 영화가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상영되며, 그가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의 영화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애쓰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거울'을 하이라이트로 다룬 이 책을 통해 타르코프스키의 영혼을 훨씬 가깝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8. 눈 깜빡할 사이 - 영화 편집에 대한 연구 _ 월터 머치 저, 문원립 옮김, 비즈앤비즈
이 얇은 책의 가격이 그 새 배로 뛰었네요.
월터 머치는 가죽 재킷을 입고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다니는 전형적인 히피 세대입니다.
그리고 조지 루카스와 프란시스 코폴라가 조이트로프사를 세우고 초창기에 고군분투할 때부터 그들의 영원한 동지이자 비장의 무기인 헐리우드 최고의 편집기사이자 사운드 디자이너 입니다. 대표작으로는 지옥의 묵시록, 컨버세이션, 잉글리쉬 페이션트가 있는데, 미국 영화 학계에서 편집이 훌륭한 영화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작품들이죠.
철저히 분업화된 헐리우드 시스템에서 월터 머치는 드물게 사운드 디자인과 편집을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가 작업하는 방식을 보면, 왠지 사운드 디자인과 편집은 꼭 한 사람이 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필수적인 연관성을 간파해서 사운드가 아니면 편집이 안 되게, 편집이 아니면 사운드 홀로 설 수 없게 해버리는 사람이 월터 머치입니다.
남들이 도저히 따라할 만한 것이 아닌 게, 어릴 때부터 카셋트 테입 여러 개로 사운드 믹스 하는 걸 놀이삼아 했다고 하더군요.
월터 머치는 서서 작업하는 걸로도 유명합니다. 책상에서만 작업을 해야 하는 편집 일의 특성상 대단히 괜찮은 태도긴 한데, 아무나 따라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암튼 그런 그가 영화 편집의 비밀을 선뜻 쿨하게 공개한 것이 이 유명한 (미국에선 상당히 유명합니다.) 저서, 눈깜빡임 입니다.
지옥의 묵시록을 언급하는 시작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데, 자신이 작업한 시간을 컷 수로 나눠보니 하루에 한 컷씩 붙인 꼴이었다는 회고로 시작합니다.
9.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10분 짜리 영화학교 - 7천 달러로 혼자 만든 영화, 세상을 놀라게 하다. _ 로버트 로드리게즈 저, 고영범 옮김, 강 (절판)
이 책은 미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상당히 논쟁적이라고 합니다.
논쟁의 포인트를 쉽게 정리하면
헐리우드, 옆에서 콕 찌를까, 안에서 기어올라갈까 가 되겠습니다.
헐리우드 외곽에서 한복판으로, 불과 20대 초반에 한 방에 정복하기로, 로드리게즈는 스필버그가 무색할 정도로 정통하죠.
이 책은 그가 불과 21살 나이에 혼자 투자, 각본, 제작, 촬영, 연출, 편집, 사운드를 도맡아 한 '엘 마리아치'로 어떻게 헐리우드에 입성했는지를 나름 담담히 술회한 상당히 흥미진진한 제작기입니다.
로버트 로드리게즈가 이후의 행보로 자신이 운 좋은 허당이 아닌 걸 입증한 것처럼 이 책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단돈 700만원으로 장편 액션 영화 만든 과정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고 이야기 하지만, '그게 나니까 가능했다'는 점을 여러번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7살 때부터 대학 진학 때까지 집에 있는 비디오 데크 두 대로 홈비디오를 제작, 편집했다고 합니다. 그게 너무 재밌어서 주로 그러고 놀면서 성장한 거죠.
이 6헤드 조그셔틀 비디오 데크로 동영상 편집해본 사람들을 알테지만, 이거 열심히 하다보면 편집 감이 비상하게 좋아집니다.
말그대로 감으로 계산을 때려야 하는 노가다기 때문이죠.
만 시간의 법칙이 이런 케이스에 적용될 것 같은데, 어릴때부터 이러고 놀았으니, 그는 장편 영화를 구상할 때 이미 머릿속에 (시쳇말인) 커터바리를 완벽하계 구상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 호흡을 잘 알고 있으니, 불과 3주 동안 모니터도 불가능한 촬영장에서 자기가 찍고 싶은 컷만 찍을 수 있었던 거죠. 만약 패기로만 똘똘 뭉친 사람이 그렇게 찍었다면, 나중에 편집할 때 큰 고생 했을 겁니다. 예상한 것과 찍힌 게 다르다는 걸 깨달을 거니까요.
암튼 이 책은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강점과 패착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후반부, 콜롬비아에 정식 계약한 감독이 된 부분을 보면 지금까지 헐리우드의 외곬수로 낙인찍힌 그의 오만함이 그대로 엿보입니다.
만만치 않은 대형 스튜디오의 시스템을 불과 21살 감독이 일일이 꼬집으며 평가 절하하고, 결국 자신이 모든 걸 도맡아하는 모습을 보이거든요.
니들은 노조도 엉망, 기획 회의도 엉망, 홍보도 엉망 ... 이런 식입니다.
물론 이도 로버트 로드리게즈니까 이해는 갑니다. 그렇게 해놓고 자기 앞가림 못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세운 트러블메이커 스튜디오에서 모든 공정을 자신이 관여한 수작업으로 멋진 영화들을 내놓고 있으니까요.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또 다른 훌륭한 점은, 이 책에서 시작한 '10분 짜리 영화학교'를 브랜드화 해서, 아직까지 자신이 만든 모든 영화에 이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의 10분짜리 영화학교는 영화 만들기에 대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짜배기 강의입니다.
아래는 영화 플래닛 테러의 디비디 서플로 있는 10분짜리 영화학교입니다.
10. 올리버 스톤 1, 2 _ 제임스 리어단 저, 김순호 옮김, 컬쳐라인 (절판)
이 책은 다른 책에 비해서도 유난히 국내에 인기 없는 영화 서적인데, 그 퀄리티가 상당히 좋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제임스 리어단은 미국의 저명한 문화 평전 작가 입니다. 짐모리슨 평전도 꽤 유명하더군요.
올리버 스톤은 지금은 상당히 힘이 떨어진 듯 보이지만, 한때 헐리우드에서 가장 정력적이고 논쟁적인 작가였습니다.
이 작품은 올리버 스톤이 킬러, 유턴을 만들면서 대중의 관심에서 서서히 멀어지기 직전에 쓰인 작품인데, 올리버 스톤이 한때 얼마나 대단한 인간이었는지 아주 생생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올리버 스톤의 유년, 청년 시절은 유독 독특합니다.
아버지는 금융인이었는데, 뉴욕 번화가에 5층짜리 고급 빌라에 거주할 정도로 부자였다고 합니다.
어린 올리버 스톤이 한 층을 통째로 자기 방으로 썼다고 하네요.
엄마는 모델 같은 외모의 전형적인 파티걸이었는데, 불행한 결혼생활을 끝으로 이혼했습니다.
아버지는 왠지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금융인을 떠올리게 하는데, 사생활이 문란했고, 아들이 10대 후반이 됐을 무렵엔 '너도 남자니까'라는 이유로 사창가를 데려가 줬다고 하더군요.
엄마는 아버지와 이혼한 뒤로는 극도의 문란한 생활에 빠져 들었는데, 올리버 스톤 친구의 증언으로는 아들 앞에서 아무렇지고 않게 알몸으로 남자들과 뒤엉킨 모습을 보여줬다고 하네요.
제가 봤을 때 올리버 스톤은 그 덩치 만큼이나 강력한 멘탈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멀쩡하게 성장했으니까...
암튼 이런 아들이 당연히 반항기로 똘똘 뭉쳤을 테고... 그래도 머리는 좋아서 소설가가 되려고 예일대에 입학했는데, 애들이 너무 재수없어서 1년동안 원양어선 타고 뱃사람으로 생활하다가 베트남 전이 터지자 입대합니다.
군생활 자체도 최전방 수색대에서 제대로 빡세게 합니다.
올리버 스톤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사에 큰 공헌을 한 게 하나 있는데, 플래툰을 연출하며 배우들 사전 훈련 및 현장 교관 시스템을 적용한 겁니다.
그러면서 발굴한 인물이 '데일 다이'라는 헐리웃 전쟁 영화의 질을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한, 전직 군인 테크니컬 디렉터입니다.
이 아저씨, 배우로도 종종 나옵니다. 유명한 게,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연대장.
요 아저씨입니다.
암튼 요것도 에피소드 일부고, 올리버 스톤이란 개인사와 그의 영화세계가 맞물려 대단히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전성기의 올리버 스톤은 참 대단한 인간이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지금은... 많이 아쉽죠.
이상 영화서적 10 베스트였습니다.
이외의 흥미로운 영화 서적들.
C학점의 천재 스티븐 스필버그 1, 2 : 이거 진짜 재발매 됐으면 하는 영화 서적 1위인데, 조셉 맥브라이드의 저서 입니다. 제목을 개판으로 지어서 그렇지, 미국에서 출판된 수많은 스필버그 연구서 중에 가장 권위 있는 제대로 된 평전입니다.
우리나라에 저따우로 얇은 두권짜리로 나오더니 아주 옛날에 절판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이 책을 아주 상당히 좋아하지만, 제대로 된 재출간이 되기 전까진 순위 외입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삶 역시 다른 어느 영화감독 못지않게 드라마틱합니다. 상당히 재밌는 평전.
데이비드 린치 빨간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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